[주간조선]유쾌한 사람들이 사는 행복한 대륙 아프리카는 ‘선물’ 같은 곳(신미식 회원)
사진전 여는 ‘마다가스카르의 작가’ 신미식
파란 하늘, 짙은 황톳빛의 땅, 나무가 뿌리를 위로 하고 거꾸로 땅에 박혀 있는 듯한 모습의 바오밥나무, 호수 위로 내걸린 쌍무지개, 강렬한 색채와 무늬의 옷을 입고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사람들. 신미식(49) 사진작가가 카메라에 담은 마다가스카르의 모습들이다. 그의, 인도양의 거대한 섬나라 마다가스카르 사진은 매우 선명한 색감을 담고 있었다.
지난 6월 14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 ‘카페 마다가스카르’에서 신미식 작가를 만났다. 약속했던 인터뷰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카페를 구경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검은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신 작가였다. 49세의 나이에 비해 10살은 더 젊어보였다. 신 작가는 “철이 안 들어서 그렇다”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여행사진작가 1세대로 분류되는 신미식 작가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공화국을 찍는 사진가’로 잘 알려져 있다. “평생 사진을 찍어도 ‘대가(大家)’가 될 수 없단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어요. 제가 찍는 여행사진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운이 좋은 사진작가’일 뿐입니다.”
신미식 작가는 ‘마다가스카르 이야기’(2006), ‘에티오피아, 천국의 땅’(2009) 등 18권의 저서와 각종 사진전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이고 있다. 6월 28일부턴 그의 고향 경기도 평택시 국제교류문화센터에서, 30일부턴 서울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열리는 아프리카문화축제 사진전에서 작품전시회가 열린다.
‘카페 마다가스카르’를 열다
2007년 문을 연 ‘카페 마다가스카르’는 신 작가가 운영한다. 카페 안은 그가 마다가스카르에서 찍은 사진들, 마다가스카르의 상징인 바오밥나무와 기린 모양의 소품들, 오래된 카메라들, 아프리카 관련 서적, 여행가방, 커피 향으로 가득 차 있다.
카페 이름을 지을 때 주저없이 ‘마다가스카르’를 선택했다는 신 작가의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그가 난생처음으로 밟은 아프리카 국가가 마다가스카르였다. 신 작가는 “6년 전 마다가스카르를 처음 방문했을 때 이 나라가 저한테 착 감겨오는 느낌이었다”며 “이전에도 여러 국가를 가봤지만 ‘남은 삶을 여기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신 작가는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공용어인 말라가시어나 프랑스어는커녕 영어도 잘 못했지만 동네 가게만한 공항과 소박한 마을 풍경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신 작가는 마다가스카르에서 평생친구도 만났다. 신 작가와 국적을 뛰어넘어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나이보는 신 작가의 첫 현지인 가이드였다. 음악가이기도 했던 나이보는 신 작가가 올 때면 항상 공항에 마중을 나왔고 신 작가가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가이드 겸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신 작가는 나이보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카메라를 선물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카메라를 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전 그 친구를 완전히 신뢰했고 나이보 역시 절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 친구와 함께 더 많은 일을 해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지금 돌이켜 보면 나이보란 친구가 있었기에 마다가스카르를 그토록 좋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친구 나이보의 나라
3년 전 또 한번의 마다가스카르 여행을 준비하고 있던 신 작가는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나이보의 부인이 그의 사망을 알려왔다. 교통사고였다. 신 작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 신 작가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그렇게 울어보긴 처음이었다”며 “90개 국가를 다녀봤지만 그토록 마음을 준 사람은 유일했다”고 말했다. 신 작가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부조금을 마련해 나이보의 가족에게 전달했다. 그후 3년 동안 신 작가는 마다가스카르에 가지 않았다.
“한번은 나이보가 저한테 NGO냐고 묻더군요. 안 그러면 왜 자꾸 뭔가를 우리들(마다가스카르 사람들)한테 못 줘서 안달이냐, 우리가 불쌍하냐고 말입니다.” 차를 타고 길을 가다가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자를 벗어 주거나 먹을 것을 나눠주고 줄 게 없으면 자신의 증명사진이라도 쥐어주고야 마는 신 작가가 나이보의 눈엔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당시 신 작가는 후배에게 신용카드 대출을 해줬다가 대금이 연체돼 신용불량자 신세였다. 이전엔 채무가 쌓여 5년 동안 주민등록이 말소된 채 살기도 했다. “제 눈엔 돈 걱정 없고 먹을 것이 풍족한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이 오히려 부러웠습니다. 동정이 아니라 동경이었죠. 나이보는 결국 “미스터 신처럼 우리나라(마다가스카르)를 사랑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하더군요.”
올해 4월 신 작가는 친구의 나라를 다시 찾았다. 3년 만이었다. 처음으로 나이보가 공항에 마중 나오지 않은 방문이었다. “허전하고 이상했습니다. 이런 느낌이 들까봐 이곳에 다시 오기 힘들었죠.”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친구가 묻힌 곳을 찾아 “펑펑 울었다”는 그는 “그제야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미식 작가는 한 잡지사 아트디렉터 일을 그만두고 31세부터 세계를 여행하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사진작가의 길로 접어든 건 36세 때부터였다. 신 작가에게는 사진이 곧 여행이자 나눔이었다. 아프리카로 떠나는 그의 짐가방 안엔 항상 소형 프린터와 인화지가 들어있었다. 차를 몰고 가다 마을을 만나면 그곳 사람들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찍어 바로 인쇄해 줬다. “아프리카 시골 마을엔 사진이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사진을 보면 매우 재밌어하고 신기해합니다.” 이 때문에 신 작가의 사진 속 아프리카 사람들은 유독 많이 웃고 있다.
신 작가에게 아프리카는 결코 ‘슬픈 검은 대륙’이 아니었다. 보통 사진을 찍을 때 자신 앞에 있는 대상과 친구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찍는다는 그는 “ ‘아프리카’ 하면 오염된 마을과 질병과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며 “제가 아프리카 사람들을 만나서 노는데 어떻게 슬픈 사진이 나오겠어요?”라고 반문했다.
“에티오피아에 신발 신겨주러 갑니다”
신 작가는 오는 9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지역을 찾아 신발 1000켤레를 선물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신발을 신겨주면 그 나라의 사망률이 20% 낮아진다고 합니다. 맨발로 다니면서 감염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죠. 이 사실을 알고부턴 평소 아프리카 국가들을 다니며 항상 그들의 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이들을 위해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한 끝에 신발을 선물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직 신발을 구하진 못했지만 어떻게든 해봐야죠.”
이런 그에게 “자선사업가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퍼주느냐” “사진작가가 본업에 힘쓰지 않고 딴생각부터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신 작가도 그에 대한 이런 평가를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그가 아프리카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그의 아프리카에 대한 사랑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를 좋아하는 이유는 늘 가난하게 살던 내가 아프리카에 가면 나눌 것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삼촌이 조카에게 뭐라도 하나 더 선물해주고 싶은 것처럼, 제게도 아프리카는 그런 존재입니다. 제가 주는 만큼 아프리카도 제게 큰 선물을 줍니다. 아무것도 아니던 제게 사진작가란 타이틀을 줬잖아요?”